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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역사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지음

중동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석유', '더운 날씨' 등 다양한 이미지가 있겠지만 중동은 이슬람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특유의 보수성과 종종 뉴스에서 전해 듣는 테러 등으로 인해 이슬람교와 중동은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특히 그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무슬림들은 왜 종교를 저토록 중요하게 생각할까?"


유럽은 과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를 종교로써 받아들였다. 즉,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를 국가의 통제 아래로 가져온 것으로, 국가와 종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 국가에 의해 종교가 포섭된 셈이다. 하지만 중동의 나라들은 이와 다르다. 이슬람 공동체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나라가 탄생했다. 종교가 곧 나라가 된 것이다. 후에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열강에 의해 중동에 국경선이 생기고 나라들이 세워졌으나 같은 나라의 국민들 간 공통된 정체성이 전혀 없는 경우도, 반대로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나라 국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현재의 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부터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중동에서 발생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까지 갈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중동사의 21가지 장면(사건)을 소개하면서 현재의 중동을 설명하고자 한다.


출처 : https://pixabay.com/ko/

Scean 01. 무함마드, 신의 계시를 받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역사서라고는 하나, 중동은 이슬람교 없이 논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첫번째 주요 장면은 이슬람교의 탄생이다.

서기 610년, 천사를 통해 알라(유일신)의 계시를 받게 된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했고 자신이 전하는 종교를 '복종'이라는 뜻의 이슬람으로 칭했다. (참고로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게 된 그날을 기리기 위해 라다단 기간 한 달 동안 금식을 하며, 지금도 이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 무함마드를 추종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기존의 지배세력들은 이 신흥세력에 위협을 느끼며 핍박했고, 결국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메카의 북쪽인 야스리브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슬람에서는 이 시건을 '헤지라'라고 부르며 거룩하게 기념하고 있고 야스리브는 나중에 '메디나'로 이름이 바뀐다. 훗날 이슬람 제국은 무함마드와 그 일행이 메디나에 도착한 날인 622년 7월 16일을 기원으로 삼아 이슬람력을 만들었다.

메디나에서 세력을 키운 무함마드와 그 일행은 메디나를 손에 넣고 메카로 향했다. 메카의 부족장들은 자진하여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메디나의 지배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무혈입성을 했다. 무함마드는 메카와 메디나가 포함된 히자즈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부족들과 종교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각 부족들로부터 세금도 거두었다. 또한 신도들 중 젊은 남성들을 병사로 선발해 군대도 만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이슬람 공동체는 아직 국가라기보다는 종교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종교공동체가 먼저 존재했고 이후 종교가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국가가 탄생했다. 20세기 이전까지 이슬람권에서는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채 한 몸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예언가 무함마드는 메카에 입성한 지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인 칼리파들은 '온 세상이 알라에게만 예배드릴 때까지 거룩한 싸움인 성전을 계속한다'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비전을 물려받아 계속 전진했다. (칼리파는 '알라의 사도의 후계자' 즉, '무함마드의 후계자'란 뜻으로 이후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최고지도자를 의미하는 용어가 됐다.)

이슬람교와 유대교, 기독교는 모두 하나의 뿌리를 가진 종교로써,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었던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에 빠르게 흡수됐다. 이미 기독교를 잘 알고 있던 이들에게 이슬람교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가 아닌 기존 일신교 신앙 위에 조금 다른 주장을 가미한 것이었다. 더구나 아시아 지역의 경우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지배자들보다 아랍의 정복자들이 문화적으로 더 친근한 존재였다. 이슬람교 전파 과정에서 아시아 지역 주민들의 저항이 크지 않았던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전파를 통해 아랍어 또한 확산되었는데 아랍어가 확산되며 아람인 또한 확산됐다. '아랍인'이란 인종 개념이 아니라 문화 개념에 가깝다.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는 이들을 역사적으로 아랍인이라고 불렀다. 콥트어를 쓰고 기독교를 믿던 이집트인들이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면서 이집트인들의 정체성도 서서히 아랍인으로 바뀌었다. 이슬람교가 탄생하기 전까지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들 간의 공통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아랍인'은 '이슬람교'와 더불어 탄생한 민족인 것이다.

참고로 이란은 페르시아의 후손으로,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 아랍과는 그 뿌리가 다르며 아랍인으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마치 한국인에게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Scene 06. 하심 가문, 영국과 거래하다.

20세기 초, 현재 터키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안보를 가장 위협하는 국가는 러시아였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나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오히려 러시아와 손을 잡고 삼국협상을 체결했다. 그러자 오스만 정부 내에서는 차라리 신흥 강국 독일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물리치자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을 상대로 제1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독일은 오스만 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했다. 독일은 오스만 제국이 참전해 함께 싸우는 대가로 군사, 재정, 물자 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출처 : https://pixabay.com/ko/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예상보다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집트와 시리아 전선에서 영국과 아랍반란군에게 무너지면서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이스탄불은 영국군 점령 아래에 놓였으며 모든 아랍어 사용 지역은 오스만의 통치에서 해방됐다. 그리고 전쟁의 승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중동지역은 영국과 프랑스라는 외세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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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그야말로 온갖 이해관계가 뒤얽혀 있는 지역이다. 종교뿐 아니라 지역적인 특성과 석유라는 자원으로 인해 끊임없이 외세의 영향을 받아온 것을 보면 석유라는 자원이 축복만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여하튼 중동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동시에 복잡한 대상이라고 느껴진다. 특히 '시리아 내전'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중동 내 모든 정체성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역사적인 배경지식 없이는 시리아 내전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책과 함께 중동 역사의 21가지 장면(Scene)을 모두 여행하게 되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던 중동을 조금을 이해하게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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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왜 싸우는가?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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