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힘은 실로 크다.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특정 프로에 출연해 인지도가 올라간 전문가는 다른 프로에 계속 등장하고 책도 펴낸다. 이미 출판되어 서점 어딘가 숨어있던 책은 '어떤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누구의 책'이라고 Cover가 달려 다시 매대 앞을 차지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알쓸신잡의 여러 박사(교수)들과 어쩌다 어른, 차이나는 클라쓰 등의 교양 프로에 출연한 전문가들이 생각난다.
블로그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는 알쓸신잡이라는 프로의 팬이다. <어디서 살 것인가>의 저자인 유현준 교수 역시 알쓸신잡 시즌2에 건축 박사로 출연했다. 그 영향으로 이 책을 읽은 것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건축에 관해서 전혀 아는바도,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을 통해 저자의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와 말투, 약간의 성격도 알게 되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 깊지 않은 내용과 흥미로운 소재, 비유들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의 학교와 교도소는 둘 다 운동장 하나에 4~5층짜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창문 크기를 빼고는 공간 구성상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교도소 혹은 군대의 연병장과 막사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시설에서 12년을 보낸다면 그 아이들은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똑같은 옷, 똑같은 식판, 똑같은 음식, 똑같은 교실에 익숙한 채로 자라다 보니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왕따를 시킨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난 사람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양계장 같은 학교에서 12년 동안 커 온 아이들에게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다.
뉴요커가 좁은 집에 살아도 되는 이유
단위 면적당 부동산이 가장 비싼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좁은 집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라이프는 그렇게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간 소비의 측면에서 뉴요커들은 아주 넓은 면적을 영유하며 살기 때문이다. 집 크기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은 일단 센트럴 파크나 브라이언트 파크 같은 각종 공원들을 오가며 즐긴다. MoMA와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도 매주 금요일에는 공짜로 즐길 수 있다. 한마디로 그들의 삶은 세 들어 사는 작은 방에 갇혀 있지 않다. 그들은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재미난 공간들을 거의 무료로 즐기면서 살 수 있다.
현대 도시를 만든 백만장자들
이제 미국 국민은 포드가 만든 자동차에 록펠러가 만든 휘발유를 넣어 달리고, 카네기가 만든 강철로 지은 고층 건물에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 후 저녁에는 모건이 만든 발전소 전기를 이용해 에디슨이 만든 전구를 켜고 지내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은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여행 vs 만화
고등학생 아들과 세뱃돈 사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필자는 그 돈으로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면 넓은 세상을 보며 여행하는데 쓰면 좋겠다고 했다. 아들은 만화를 보거나 오락만 해도 충분히 행복한데 왜 굳이 여행을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대화 속에서 발견되는 두 세대 간의 차이는 '공간과 미디어의 대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산다는 것은 나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것을, 자동차 소유는 내가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공간의 확장을, 세계여행 역시 개인의 공간적 확장을 의미한다. 기성세대가 추구하는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공간과 관련된 가치들이다. 반면 젊은 세대의 우선순위는 스마트폰으로 영화 보고, 음악 듣고, 만화 보고, 게임을 하면서 즐기는 데 있다. 이들에게 실제 공간을 소비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대신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뿐이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회사원들 말이다. 심지어 회사에서 만나는 팀원들은 대학 전공까지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나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을 건축적으로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제목과는 그다지 연관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지만, 유현준이라는 건축가의 생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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